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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칼럼] ASF 발생의 폐해 - 기울어진 들녘에서 도둑맞은 노동

강원대학교 수의과대학 박선일 교수

[오픈 칼럼(관련 정보)은 열린 소통을 추구합니다. 한돈산업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칼럼에 담긴 의견은 본지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돼지와사람]

 

 

국방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 납세의 의무.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4대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 의무를 지키지 않으면 관련 법률에 따라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강제 사항이다.

 

2019년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생하자 정부에서는 예방적 살처분, 강화된 방역시설 설치 의무화, 권역화, 출하 및 입식 제한, 농가 폐업, 외국인 노동자 유인, 농장 방역 점검과 실험실 검사 확대 등 일련의 후속 조치가 이어지면서 이에 따른 다양한 사회적 이슈가 동시에 불거졌다.

 

가장 우려되는 대목은 방역정책과 산업 지속성(continuity of business) 간 공존 문제다. 중요성 측면에서 둘 중 우선 순위 하나를 꼽으라면 당연히 '산업'이라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는 ASF 방역 정책이 추구해야 할 방향성과 목표를 시사한다. 즉 산업을 유지하는 원동력은 이해당사자인 생산자와 수의사로부터 태동한다는 대명제 하에 정책이 수립되고 이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그간의 방역 정책은 생산자와 수의사 모두로부터 근로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급기야 난해한 ASF 방역 시스템의 문제는 들추지 않은 채 희생양의 제물로 농가를 특정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말하면 지나친 확대해석인가?

 

모름지기 정책은 모든 이해당사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는 어렵다. 이러한 연유로 정책 이행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문제점을 수시로 점검하고, 필요하다면 보완하는 피드백은 당연한 절차다. 아무리 산업발전이라는 선의에서 유래한 정책일지라도 해당 산업의 지속성을 해친다면 그 책임에서까지 자유로울 수는 없다.

 

방역 정책은 태생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되는 게임이기에 상호 공존을 위해 이해당사자 간 치열한 논의와 합의를 거쳐야 하는 이유다. 농가는 방역시설 설치하느라 비용부담에 허덕이고, 수의사는 삶의 터전인 생산 현장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못하고, 정책 이행과정에서도 도외시되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해당사자의 자발적 협조를 구하지 않는 정책은 그 수명을 보장할 수 없고, 만족스러운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게 만들 뿐이다. 미봉책은 또 다른 방편을 찾기 마련이고, 이러한 악순환의 대표적인 사례가 살처분 보상금 문제다. 가축전염병예방법 개정에 따라 2015년 12월 23일부터 시행하고 있는 살처분 보상금 지급요령을 보면 25개의 감액 기준과 4개의 감액의 경감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세부 기준을 자세히 살펴보면 관계 법령에 명시된 규정을 준수하고 있는지를 감독하는 행정 절차에 불과하고, 해당 기준이 질병 발생과 역학적인 인과적 연관성(causal association)이 규명되지 않은 채 남용되고 있다는 점은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

 

데이터 기반의 학술적인 근거가 뒷받침되지 않고, 오로지 행정 편의적으로 수립된 정책은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의사와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고, 결국 피해는 방역 당국을 포함한 모든 이해당사자의 몫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2000년 구제역이 발생하자 정부에서는 ‘방역은 제2의 국방’이라는 구호 앞에 한마음 한뜻으로 동참했던 기억이 그 옛날 한 편의 동화로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단순한 아이디어가 호소력이 있는 정책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만큼 지난한 절차를 거치면서 투명하게 공개되고 피드백으로 이어져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기본 원칙이 무너진 탓은 아닐까.

 

방역 당국의 고민도 많을 것이라는 건 충분히 짐작된다. 오죽하면 감액의 경감기준으로 질병 관리 1등급의 경우 10% 감액, 질병 관리 2등급은 5% 감액, 증상이 나타나기 전 조기 신고하는 경우 10% 감액, 우수 방역 추천 농가에 대해서는 10% 감액한다는 기준을 만들었을까. 일부 온당치 못한 행위를 버젓이 일삼는 농가는 ‘이익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를 부추기는 퇴출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나 홀로 살겠다는 그릇된 관행을 버리지 못한다면 방역 당국의 족쇄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물이 빠지면 누가 벌거벗고 수영하고 있는지 드러나듯 민낯을 제대로 확인하기까지는 그리 복잡한 절차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지만 현재 진행형인 ASF 방역 정책의 방향을 볼 때 절대로 물이 빠지는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방역 당국이 해야 할 인식의 수고까지 떠안지 않기 위해서라도 생산자 단체는 몸 안의 종기를 과감히 도려내어 새살이 돋아나도록 자기반성과 혁신을 통해 모두로부터 신뢰를 얻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정책 입안자가 내놓는 어설픈 한 개의 디딤돌은 그저 밟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그 디딤돌로 인해 무수히 많은 이해당사자의 동참과 탄식이 교차하는 삶의 터전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감히 넘볼 수 없는 성역에서 휘두르는 칼자루 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근로의 고독마저 훔쳐다가 성과의 에피소드로 삼고 싶은 사고회로는 이 정도면 족하지 않을까. 생산자와 정책 당국 모두 산업발전이라는 같은 거시적 목표를 향하고 있는 바, 기울어진 들녘일지라도 오늘도 삶의 궤적을 일구고자 묵묵히 애쓰는 이해당사자가 있음을 감안하여 설령 들고나오는 정책 수단이 달라도 상호 존중과 배려를 기꺼이 인정해 주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근로의 의무를 다하는 구성원으로 살고 싶다.

 

수일 전 별세한 축구 황제 펠레의 메시지를 기억하자. 사랑하고, 사랑하고, 영원히 사랑해라(Amor, amor e amor para sempre). 그런데 어쩌나. 내가 꿈꾸는 세상에서는 1월 4일 기준으로 2,759건의 ASF 양성 멧돼지가 검출되어 올 한해 역시 정신 줄 꽉 부여잡고 혹시나 무너질지도 모르는 그 디딤돌을 밟으며 살아가는 수밖에. 계묘년 새해에는 이 땅의 모든 이에게 노동의 기쁨이 함께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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