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F가 국내 양돈산업을 위협하기 시작한지 수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우리 농가들은 철저한 차단방역과 눈물겨운 살처분 정책을 견디며 버텨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멧돼지를 통한 바이러스 오염 지역의 확산과 잇따른 사육돼지 발생은 이제 물리적 차단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백신'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 마련을 위해 정부가 전향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상용화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관련 기사).
베트남의 사례와 한국의 엄격한 검역 기준
일각에서는 백신 도입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냅니다. 특히 백신 균주의 병원성 회복(약독화된 바이러스가 다시 독성을 가지는 현상)이나 접종 후유증(유사산, 폐사 등)에 대한 우려가 큽니다. 하지만 이는 관리 체계가 미흡한 베트남의 사례일 뿐입니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입니다. 동물용의약품 관리 시스템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농림축산검역본부의 까다로운 검토 단계와 허가 기준은 안전성이 담보되지 않은 백신이 현장에 발을 붙일 수 없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병원성 회복 우려가 있는 백신은 애초에 국내 허가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베트남의 사례를 들어 우리 기술로 개발 중인 백신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멧돼지용 백신보다 사육돼지용 백신 허가가 우선되어야 하는 이유
현재 방역 현장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야생멧돼지를 통한 바이러스 확산을 막을 '미끼 백신(경구용)'입니다. 멧돼지가 ASF의 주요 매개체인 상황에서 미끼 백신은 전염 고리를 끊을 핵심 수단입니다. 환경부는 지난 11월 야생멧돼지 확산 차단 울타리 철거를 확정했습니다(관련 기사). 포획을 통한 개체수 감소는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문제는 현실적인 절차입니다. 현행 규정상 '사육돼지용 백신(주사제)'이 효능과 안전성이 입증되어 먼저 국내 허가를 받아야만 멧돼지용 미끼 백신의 허가 절차도 진행될 수 있는 구조입니다. 돼지열병(CSF) 백신 사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사육돼지용 마커백신 → 멧돼지용 미끼백신). 결과적으로 멧돼지 방역을 서두르기 위해서라도 정부, 구체적으로 농림축산검역본부는 사육돼지용 백신의 임상과 승인 과정을 가속화해야 합니다.
사육돼지용 백신, 이동제한 해제와 재입식 기간 단축의 열쇠
백신은 단순히 돼지를 죽지 않게 하는 것을 넘어, 농가의 경제적 생존권과 직결됩니다. 현재 농장 내 ASF가 발생하거나 감염멧돼지가 발견되면 인근 반경 10km 내 농가는 30일 이상의 이동제한 조치가 취해집니다. 발생농장은 수개월의 재입식을 위한 준비 과정에서 고사 위기에 처합니다.
만약 사육돼지용 백신이 상용화되어 방역대 내 농장이나 재입식 예정 농장에 적용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백신 접종을 통해 돼지들이 면역력을 갖추게 된다면, 기존의 강력한 규제 위주 방역에서 벗어나 유연하고 효율적인 관리 위주의 방역 체계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방역대 내 농가들의 이동제한 조치를 완화할 수 있다 얘기입니다. 발생농장의 경우 엄격한 정밀검사와 백신 접종을 병행함으로써 재입식 준비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해 농가의 경영 공백을 최소화하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현장의 절박함에 정부가 속도를 더해야
ASF 백신은 더 이상 '미래의 영역'이 아닙니다. 국내 기업들이 이미 고무적인 연구 성과를 내고 있고, 상용화를 위한 막바지 단계에 와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정부의 의지입니다.
정부는 '안전성이 최우선'이라는 원론적인 답변 뒤에 숨지 말고,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신속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합니다. 멧돼지 백신 살포를 위한 행정적 선결 과제들을 빠르게 해결하고, 고통받는 양돈농가에 실질적인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끝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입니다. 선진국의 위상은 더 이상 외부의 사례를 참조하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존의 경로 의존성을 탈피하여 새로운 해법을 창조하고 앞서 나가는 것이 선진국의 본질적 정의에 부합합니다. 더 이상 골든타임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득흔 기자(pigpeople100@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