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지난 19일 한국양돈연구회 주최 '제13회 양돈연구포럼, 한돈산업과 동물복지' 주제 발표 원고입니다]
*본 원고상의 동물복지는 ‘농장동물복지’로 한정되어 사용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들어가며
‘동물복지? 배부른 소리다. 사람복지도 제대로 안되고 있는게 현실인데 말이다.’
‘동물복지인증 안하고 싶은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거다. 정부가 요구하는 기준이 너무 높다.’
‘동물복지를 하기 위해서는 돈도 많이 들고 생산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와 유럽 등 양돈선진국과는 상황이 다르다.’
‘올라간 생산비만큼 돼지고기 가격이 올라갈 텐데, 소비자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동물복지가 축산산업에서 점차 이슈다. 다른 외부 요인을 차치하고라도 일련의 구제역, 고병원성 AI, 살충제계란 사태 등을 거치면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화두가 되었다. 연일 신문 방송에 하루가 멀다 하고 관련 기사나 콘텐츠가 생성되고 있다.
해외 소식은 빠르게 번역되어 안방에 전달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이제 단순히 ‘누군가의 의도’라고 보기 보다는 ‘하나의 흐름’으로 인정해야 할 듯싶다.
지난해에는 농장 동물복지 관련 대형 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영화 ‘옥자(감독 봉준호)’다. 과거 동물복지를 주제로 다룬 영화는 고작 다큐멘터리가 전부였고 소수만이 관람했다. 하지만, 영화 옥자는 달랐다. 전세계 배급망을 통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수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이어갔고 관련 뉴스와 인터뷰가 이어졌다.
옥자는 비록 유전자조작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이었지만, 기본 속성은 ‘돼지’다. 돼지고기를 불편하게 보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오늘날 우리는 초고속 인터넷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의 특징은 정보의 빠른 확산과 공유이다. 지난해 국내 살충제 계란사태가 유럽의 그것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그리고 비슷한 시기 유럽 돼지고기에 E형 바이러스 간염 바이러스 소식에 일순 한돈산업도 잠시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살충제 계란 여파는 올해도 계속되고 있다.
동물복지 이슈는 국내로 한정할 수 없다. 외면한다고 회피한다고 그리고 잠시 뒤로 미룬다고 잠잠해질 문제가 아니다. 유럽이나 미국, 중국의 동물복지 이슈가 큰 파도처럼 부지불식간에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
동물복지는 윤리의 문제도 법률의 문제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동물복지는 ‘윤리’와 ‘철학’, ‘법률’ 등 복합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일반 소비자 입장에서는 단순히 ‘알권리’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축산물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이 동물복지의 뿌리라고 생각한다.
소비자의 관심 영역에는 사실 동물복지뿐만 아니라 환경, 안전(항생제, 살충제, 호르몬), 안심, 품질 등이 혼재되어 있다.
소비자는 단순하다. 축산물도 다른 먹거리와 마찬가지로 투명하고 납득할만한 과정을 거쳐 본인의 식탁위에 올라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난해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출발부터 ‘동물복지’를 강화하겠다는 축산정책이 주요 공약 중 하나였다. 반복적인 구제역과 같은 가축전염병이 문제 인식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올 1월 농림축산식품부(이하 농식품부)가 밝힌 농정 정책의 한 축에 '농장동물의 복지 향상'이 명확하게 확인된다. 축산악취 민원과 살충제·항생제 이슈, 질병 다발 등의 원인을 '동물복지'와 연관 짓고 있다.
농식품부는 이미 살충제 계란과 고병원성 AI 사태를 이유로 산란계의 사육밀도를 넓히고 계란에 사육환경을 표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오는 8월부터 계란에는 닭을 사육하는 환경에 따라 '1(방사사육), 2(축사내 평사), 3(개선된 케이지), 4(기존 케이지)'와 같이 사육환경에 해당하는 번호로 표시하여야 한다. 돼지고기도 멀지 않았다.
농식품부는 양돈과 관련해서는 임신돈의 사육면적을 넓히고 스톨 사육기간 단축 추진에 들어갔다. 더불어 가축의 건강 관리를 위한다는 명분 하에 암모니아 농도 기준과 함께 축사조명 기준을 설정할 예정이다.
축사적법화가 '환경개선'의 덫이 되었듯이 동물복지는 '냄새없는 축산', '가축전염성 질병 예방'과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 등의 덫이 될 가능성이 높을 전망이다. 양돈산업이 현재 정부 주도의 농장동물복지 사업에 과거와 같이 수동적으로 대응할 경우 더욱 그러할 것이다.
동물복지인증 제도, 한계를 인정하자
우리나라에서 양돈을 포함한 동물복지는 현재까지는 ‘정부주도’이다. 풀무원 및 소비조합 등에서 일찌감치 시도한 바는 있으나, 전체 산업으로 보면 작은 규모에 불과하다.
국내 돼지의 동물복지 인증기준은 2013년 만들어져 2014년 5월 ‘강산이야기’를 시작으로 첫 동물복지인증 양돈농장이 탄생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12개에 머무르고 있다. 4년동안 12개(1년에 3개) - 농가의 관심이나 의지 부족보다는 제도의 문제이고 운영의 문제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매해 정부는 동물보호·동물복지 관련 소비자 설문조사를 발표하고 있다. 매년 국민들은 농장동물 복지 향상 필요성에 공감하며 특히, 비싸더라도 복지 인증 축산물 구입 의향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실제 그렇지 않다. 이는 ‘30:3 신드롬(Cowe & Williams 2000)’으로 설명된다. 윤리적인 상품에 긍정적인 답변을 한 30%의 소비자 가운데 실제 구매한 소비자는 3% 미만이라는 것이다.
동물복지 인증도 수익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사명감이나 자기만족으로 비즈니스를 할 수 없다.
한돈산업은 이미 동물복지를 하고 있다
동물복지를 얘기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구는 영국에서 정한 ‘동물의 5대 자유(Freedoms)’이다. 배고픔, 불편함, 질병, 두려움, 활동의 부자유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앞서 12개 동물복지인증 농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농장들은 반동물복지 농장이 아니다. 실상 모든 돼지농가에서는 돼지복지(Pig welfare)를 위한 다양한 보살핌과 요소들을 제공하고 있다. 생산성과 동물복지는 반대의 개념이 아니다. 다만 효율의 차이이다.
스트레스를 받고 질병에 노출된 돼지에게서 좋은 생산성을 기대할 수 없다. 일상 농장의 관리자가 매일돈사와 돈방, 돼지를 관찰하고 환경을 모니터링하며 신선한 사료와 물이 적절하게 공급이 되는지를 관리하는 것 자체가 돼지복지이다.
최근 CCTV와 스마트폰, ICT 장비들이 보급되면서 점차 24시간 모니터링과 돌봄 관리가 가능해질 전망이다.
동물보호단체가 대표적으로 한돈산업을 비난하는 방식이 있다. 양돈인들은 동물복지에 관심이 없고 공장식 축산을 통해 돈을 벌려고 한다는 것이다. 돼지는 ‘기계’가 아니다. 기계일 수 없다.
누가 뭐라해도 돼지를 가장 잘 알고 최상의 돌봄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은 정부도 아니고, 동물보호단체도 아닌, ‘양돈인’이다.
한돈산업은 충분히 동물복지 관련 자신감과 자긍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물론 부족한 점이 있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점차 개선해야 할 문제일 뿐인 것이다.
한돈산업, 이제 돼지복지 아젠다를 주도하자
이제 결론이다. 동물복지와 관련 한돈산업에 제안하고 싶은 것은 이제 동물복지라는 아젠다(의제)를 정부에 맡길 것이 아니라, 역으로 주도하자는 것이다. 이대로 동물복지를 정부에만 맡긴다면 동물복지는 계속 ‘규제’라는 틀로 다가올 것이고 속절없이 한돈산업을 무너뜨릴 수 있는 ‘아킬레스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젠다를 주도하자는 이유는 한돈산업 스스로 돼지복지의 방향과 속도를 정하자는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이미 한돈산업은 농장 내에서 돼지복지를 실천하고 있다. 다만 관점의 변화와 사용하는 언어만 바꾸면 된다.
구체적으로 이를 위한 방법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돼지복지 관련 민관산학의 공식 위원회를 조직화하고 주요 현안 및 이슈를 논의하고 중장기 플랜을 만들어 가자. 필요하다면 전문가에게 용역을 맡겨 소비자들이 납득할 만한 로드맵을 만들어 나가자.
2. 동물복지 관련 한돈산업의 규범(스튜어드십 코드, Stewardship code)을 만들어 나가자. 장기적 차원의 한돈의 가치 향상과 지속가능한 성장을 목표로 하면서 아울러 당장 소비자가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 강령이 필요하다. 이의 실천을 위한 정기적인 교육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3. 민간 돼지복지 인증제를 만들자. 정부의 인증처럼 YES or NO가 아니라, 동물복지 단계를 3개로 나누어 낮은 단계부터 높은 단계로 인증을 구분하고 이를 축산물에 표시해 소비자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자. 1단계는 전체 농장의 80%가 달성할 수 있는 수준이 되야 한다. 나아가 한돈의 동물복지 인증제를 수입육과의 차별화로 연결시킬 수 있도록 하자.
글을 마무리하며
최근 한돈협회는 정부당국에 동물복지 정책과 관련 협회의 의견을 전달하면서 ‘감금틀’을 ‘스톨’로 표현해 줄 것을 요청했다. ‘감금틀’이라는 표현 자체가 소비자에게 오해를 불러 올 수 있다는 주장이다. 바람직한 요청이고 주장이다.
이 시점에서 정부당국이 ‘감금틀’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 짚어보자면 결국은 동물보호단체의 ‘용어’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공장식 축산’, ‘속성비육’도 마찬가지다. 단어가 주는 프레임 효과는 대단하다. ‘살충제 계란’, ‘고름 우유’가 그러했다.
오늘날 한돈산업은 시대와 소비자의 변화를 읽어내야 한다. 거대한 정보와 소통의 흐름 속에 과거 방식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유럽과 미국의 양돈산업은 이미 동물복지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해 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한돈산업을 계속 관찰하면서 한돈의 약한 고리를 찾고 있을 것이다.
돼지복지는 돼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공존의 길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점차 한돈산업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한 필수 선택일 수 밖에 없다. 한돈산업은 돼지복지라는 무한의 계단에 첫 발을 내딛기만 하면 된다. 그게 시작이다.
‘한돈산업은 돼지를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