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 좋은 기술이 있으면 돈 주고 사서 쓰면 되지 않느냐.”
요즘 인공지능(AI) 관련 기술을 두고도 종종 나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관련 기술이 전혀 없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가격도, 조건도 기술을 가진 쪽이 결정합니다. 그래서 세계 각국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자체 AI 기술 확보에 나서고 있습니다.
돼지도 비슷한 상황을 맞을지 모릅니다.
세계 최대 종돈회사 가운데 하나인 'PIC'는 PRRS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 돼지를 개발해 지난해 미국 FDA 승인을 받았습니다(관련 기사). 올해 1월에는 캐나다에서도 식품 판매 및 생산·수입과 관련한 규제 문턱을 넘었습니다(관련 기사). 미국에서의 FDA 승인 자체가 즉각적인 상용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 종돈산업에서 '질병에 걸리지 않는 돼지'가 새로운 경쟁 형질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돼지가 우리나라에도 정식으로 들어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국내에 경쟁할 기술이 없다면 선택지는 사실상 해외 유전자에 의존하는 것뿐입니다.
다비육종 윤성규 대표가 아직 국내에는 제대로 된 허가 기준조차 없는 PRRS 저항성 돼지 개발에 일찌감치 뛰어든 이유입니다.
흥미롭게도 윤 대표는 원래 반도체 연구원 출신입니다. 서울대학교 화학과에서 학·석·박사를 마친 뒤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일했습니다. 이후 다비육종 육종연구소장과 영업본부장, 대표이사를 거쳐 지난해 사장에 취임했습니다.
첨단기술 산업을 경험했던 그가 이제는 반도체가 아닌 돼지의 유전자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 준비도 안 돼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다비육종이 PRRS 저항성 돼지 연구를 시작한 직접적인 계기는 해외의 움직임이었습니다.
PRRS 바이러스가 돼지의 면역세포에 침입할 때 이용하는 CD163 수용체의 특정 부위를 유전자편집하면 감염을 막을 수 있다는 연구들이 나오고, PIC가 이를 상용화하기 위한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윤 대표는 당시 상황을 지켜보면서 위기감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PIC가 저 돼지를 만들어 상업적으로 허가받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보급하는데 우리가 아무런 준비가 안 돼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윤 대표는 2022년 말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장구 교수를 소개받았습니다. 두 사람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고 2023년 1월 공동연구가 시작됐습니다.
목표는 외래 유전자를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돼지가 원래 가지고 있는 CD163 유전자 가운데 PRRS 바이러스 감염에 핵심적인 SRCR5 부위를 정밀하게 교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수정란에 유전자편집을 적용하고 이를 다시 돼지에게 이식해 자돈을 얻어야 했습니다. 초기에는 수술적 이식까지 시도했지만 번번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결국 다비육종은 충북 음성의 자체 농장에 연구시설을 마련하고 LMO 연구시설 인증까지 받았습니다. 수술 방식뿐 아니라 비수술적 수정란 이식 방법을 병행하면서 시행착오를 거듭했습니다.
그 결과 지난해 5월 첫 PRRS 저항성 후보 돼지(F0)가 태어났습니다(관련 기사).
그리고 이달, ‘2세’가 태어났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이달 초 의미 있는 다음 단계가 시작됐습니다. F0 돼지끼리 자연 교배해 첫 F1 자돈이 태어난 것입니다.
“F0와 F0를 교배해서 지난주 처음 F1을 얻었습니다. 번식 능력은 일단 1차적으로 확인된 것이죠.”
유전자편집 수정란을 이식해 만들어낸 F0와 달리 F1은 이들 돼지의 번식을 통해 태어난 다음 세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다비육종은 앞으로 F1 생산을 이어가고 이후 F2까지 확보할 계획입니다.
다만 아직 넘어야 할 검증 단계가 많습니다.
인터뷰 당시 첫 F1 자돈에 목표로 한 유전자형이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분석 중이었습니다. 윤 대표는 정확한 유전자 분석 결과가 나오기까지 약 한 달 정도가 필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PRRS 저항성도 보다 엄격하게 검증합니다. 다비육종은 농림축산검역본부와 협의해 F1 자돈을 대상으로 국내 PRRS 바이러스를 이용한 공격접종 시험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현재 시험돼지들이 사육되고 있는 농장은 PRRS 양성농장입니다. 윤 대표에 따르면 해당 환경에서 F0 돼지들이 계속 사육·번식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PRRS에 감염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근거로 성급하게 결론짓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괜찮을 것 같기는 합니다. 그래도 직접 테스트를 해보고 결과를 얻어서 얘기해야겠죠.”
미국은 이미 문을 열었다…한국은 이제 논의를 시작했다
시간은 국내 종돈산업만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PIC는 지난해 4월 미국 FDA로부터 PRRS 저항성 돼지에 적용된 유전자편집 기술을 승인받았습니다. PIC는 판매에 앞서 주요 돼지고기 교역국에서 추가 승인을 확보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올해 1월에는 캐나다에서도 식품 판매 및 생산·수입이 가능하다는 규제 판단을 받았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외래 유전자를 삽입하지 않은 유전자교정(GEO) 동물을 기존 유전자변형(GMO)과 어떻게 구분하고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지 아직 명확한 제도적 길이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다비육종 역시 당장 출시 시점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F1과 F2를 거치며 유전적 안정성을 확인하고, PRRS 공격접종뿐 아니라 성장·번식·건강, 육질과 영양성분, 의도하지 않은 변이 등을 검증해야 합니다. 이후 실제 식품으로 이용할 수 있는지 관계 당국(식품의약품안전처)의 판단도 받아야 합니다.
윤 대표는 상용화가 가능한 수준까지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그것만 돼도 최소 5~6년은 걸립니다. 만약 PIC가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다른 업체보다는 우리가 빨리 대응할 수 있는 거죠. 일단 거기까지 준비해 놓자는 생각입니다.”
정부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국립축산과학원은 지난 7월 29일 종돈업계와 관련 협회·연구기관 전문가를 모아 PRRS 저항 씨돼지의 국내 개발 필요성과 협력방안을 논의했습니다. 오는 9월에는 민관 협의체를 구성해 질병 저항 종돈 개발 연구를 추진할 예정입니다(관련 기사).
유전체 분석 역량도 자체 확보
이 같은 움직임은 PRRS 저항성 돼지 개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다비육종은 지난 5월 8일 자체 유전체 분석시설인 '유전자Lab'을 열었습니다. 국내 종돈업계 최초로 유전체 분석 장비를 자체 도입하고 직접 운영하는 체계를 구축한 것입니다(관련 기사).
외부 기관에 분석을 맡기는 데서 벗어나 자체적으로 유전체 데이터를 생산하고, 이를 실제 종돈 선발에 활용하겠다는 구상입니다. 올해 하반기부터는 순종돈 선발 과정에 유전체 정보를 실제 반영할 계획입니다.
유전체 선발과 PRRS 저항성 돼지 개발은 서로 다른 기술입니다. 하지만 돼지의 유전정보를 직접 읽고 활용하는 기술을 회사 내부에 축적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방향입니다.
반도체 연구원 출신인 윤 대표가 PRRS 저항성 돼지 개발과 동시에 유전체 분석 역량까지 자체적으로 확보하고 있다는 점은 그래서 눈길을 끕니다. 향후 종돈산업의 경쟁력이 단순히 좋은 유전자를 보유하는 것을 넘어 유전정보를 얼마나 정확하게 분석하고 활용할 수 있느냐로 확대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행보로 읽힙니다.
“반드시 팔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윤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정작 '반드시 상용화하겠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이걸 꼭 성공해서 보급을 반드시 해야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PIC가 (국내시장에) 밀고 들어왔을 때 우리가 준비가 안 돼 있는 상황만큼은 막자는 게 지금 생각입니다.”
AI도 해외의 뛰어난 서비스(Claude, ChatGPT, Gemini 등)를 돈을 주고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가 자체 AI 기술 개발을 포기하자는 주장은 좀처럼 힘을 얻지 못합니다. 기술을 갖지 못하면 결국 공급자가 제시하는 가격과 조건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PRRS 저항성 돼지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외국의 PRRS 저항성 종돈이 우수하다면 농가가 선택하면 됩니다. 문제는 그것밖에 선택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특히 종돈은 한번 구매하고 끝나는 상품이 아닙니다. 우수한 유전자를 지속적으로 도입하고 증식하면서 농장의 생산기반을 만들어갑니다. 앞으로 '질병 저항성'이 산자수·성장률·사료효율처럼 중요한 종돈의 경쟁 형질로 자리 잡는다면 관련 기술의 유무는 국내 종돈산업의 협상력과 선택권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반도체 연구원 출신인 윤 대표에게 이 문제는 어쩌면 더욱 익숙한 고민일지도 모릅니다.
세계의 기술 흐름이 어느 순간 빠르게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분위기가 바뀌면 속도가 확 빨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 늦으면 안 되겠다는 겁니다.”
PRRS를 넘어 ASF·PED까지?
윤 대표가 바라보는 미래는 PRRS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PRRS는 바이러스가 세포에 침입하는 기전과 CD163이라는 표적이 비교적 명확하게 밝혀졌기 때문에 유전자편집을 이용한 저항성 확보가 가능했습니다. 향후 ASF나 PED 등 다른 질병에서도 감염에 결정적인 유전자 표적을 찾아낸다면 같은 접근법을 적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입니다.
“만약 ASF, PRRS, PED가 다 안 걸리는 돼지가 만들어진다면 경쟁력은 어마어마할 겁니다.”
PRRS가 사라졌을 때 농장에서 벌어질 변화에 대한 기대도 큽니다.
윤 대표는 PRRS를 다른 병원체의 피해를 키우는 질병이라는 측면에서 '돼지의 에이즈와 비슷하다'고 표현했습니다.
“PRRS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질병과 복합감염되면 피해가 굉장히 커집니다. PRRS가 없어진다는 것은 농장 돼지들의 면역 수준이 한 단계 올라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PRRS 백신과 치료비만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폐사 감소와 생산성 향상, 항생제 사용 감소, 사료효율 개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고 이는 다시 동물복지와 환경부담 감소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윤 대표의 생각입니다.
물론 아직은 가능성입니다. 첫 F1이 태어났지만 목표 유전자형이 제대로 전달됐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국내 PRRS 바이러스를 이용한 공격접종도 남았습니다. F2 생산과 장기간의 안전성·생산성 검증,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유전자교정 돼지를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다비육종은 그 결론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술 개발을 시작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국산 AI를 개발하는 이유가 외국 AI를 쓰지 않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기술의 선택권을 남겨두기 위해서입니다.
PRRS 저항성 돼지도 이제 같은 질문을 우리 양돈산업에 던지고 있습니다.
세계 종돈시장이 바뀐 다음 준비할 것인가, 바뀌기 전에 준비할 것인가.
이근선 기자(pigpeople100@gmail.com)










































